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가장 무서웠던 건 통증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하려던 말이 입에서 사라지고, 어제 있었던 일이 안개처럼 흐려지는 그 느낌이었습니다. 수학을 가르치며 수십 명 학생의 이름과 풀이 습관을 줄줄 외우던 사람이 그렇게 됐을 때, 뇌 건강이 얼마나 일상과 맞닿아 있는지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해마가 하는 일,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습니다
해마(Hippocampus)라는 이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귀에서 약 4~5cm 안쪽, 뇌 깊숙한 곳에 양쪽으로 자리 잡은 이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구조물이 우리 기억의 핵심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상을 보고나서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해마는 과거를 붙잡기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형성하는 기관입니다. 여기서 일화기억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하나의 맥락으로 저장하는 기억 방식을 말합니다. 마치 뇌 속에서 짧은 영화 한 편을 찍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해마가 이 기억들을 저장하는 이유는 결국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해마가 손상되면 새로운 일화기억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매 순간이 이어지지 않는 찰나의 연속이 되는 것이죠. 알츠하이머성 치매(Alzheimer's Dementia)도 해마가 가장 먼저 손상을 입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란 뇌 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퇴화하면서 기억과 인지 기능이 소실되는 질환으로,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 중 약 75%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출처: 중앙치매센터).
알코올도 해마에 치명적입니다. 음주 후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Blackout) 현상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블랙아웃이란 음주 중 해마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그 시간 동안의 사건이 아예 기록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면 장기적으로 기억 기능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기억력을 지키는 방법, 특별한 비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마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솔직히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영양제나 뇌 훈련 프로그램이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제 경험상 치료 중에 그런 것들을 찾아 헤맸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해마가 좋아하는 활동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 경험한 일을 떠올리고 순서대로 재구성하는 것
-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
- 일기나 글로 직접 써서 기록하는 것
- 대화 중 디테일을 기억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해마는 원샷러닝(One-Shot Learning)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여기서 원샷러닝이란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수천 번의 반복 학습이 필요한 현재의 인공지능 기계학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입니다. 덕분에 빠르게 기억하지만, 그만큼 디테일은 다소 흐릿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꺼내보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저는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치료 중에도 그 습관이 오히려 버팀목이 됐습니다. 그게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해마를 직접 트레이닝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해외 연구 중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결과가 있습니다. 시애틀 종단 연구(Seattle Longitudinal Study)는 20대부터 50대 성인을 수십 년에 걸쳐 추적 관찰한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연령대별로 뇌의 기능이 단순히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각 시기에 맞는 인지 능력이 발달한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출처: 워싱턴 대학교 연구팀).
중년의 뇌, 약점이 아니라 강점일 수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나빠진다는 말, 저도 오랫동안 믿어왔습니다. 치료 후 실제로 기억이 흐려지면서 그 생각이 더 굳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뇌인지과학(Cognitive Neuroscience)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뇌인지과학이란 뇌의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이 우리의 인지, 기억, 감정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연구하는 융합 학문입니다.
중년의 뇌는 반응 속도나 단기 집중력은 20대보다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마가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들 덕분에 판단력과 통찰력은 오히려 정점에 가까워집니다. 복잡한 상황에서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고, 비슷한 맥락의 경험에서 해법을 끌어내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물론 그 경험이 지나치게 강하게 각인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편도체(Amygdala)가 과도하게 반응했던 기억, 즉 극심한 공포나 충격적인 사건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편도체란 해마 끝에 붙어 있는 영역으로, 공포와 불안 같은 정서적 반응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이 편도체 기억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세상을 그 기억 하나로 해석하려는 왜곡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치료 과정에서 느꼈던 불안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이었을 겁니다. 기억이 흐려지는 경험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모든 상황을 그 두려움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결국 뇌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상을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꺼내보는 것입니다. 특별한 약이나 영양제보다 매일 겪은 일을 글로 쓰고, 사람과 대화하며, 경험을 정리하는 습관이 해마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입니다. 치료 이후 예전만 못한 기억력이 속상할 때도 있지만, 아직 제 뇌를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오늘 있었던 일 하나를 떠올려보시는 것으로 시작해보시면 어떨까요.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 문제는 반드시 의료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